■ 해고 이후 11년, 우리는 여전히 그곳에 있습니다
2004년 1월, 국내 최초 KTX 개통을 앞두고 국가에서는 대대적으로 KTX의 여승무원
을 모집했다. ‘1년 후 정규직 전환’, ‘모든 복지가 공무원에 준하는 안정적인 직장’ 이
라는 타이틀을 내건 이 사업에 수많은 인재들이 지원했다. 치열한 경쟁 끝에 20대
의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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■ 해고 이후 11년, 우리는 여전히 그곳에 있습니다
2004년 1월, 국내 최초 KTX 개통을 앞두고 국가에서는 대대적으로 KTX의 여승무원
을 모집했다. ‘1년 후 정규직 전환’, ‘모든 복지가 공무원에 준하는 안정적인 직장’ 이
라는 타이틀을 내건 이 사업에 수많은 인재들이 지원했다. 치열한 경쟁 끝에 20대
의 여성 351명이 ktx 1기 여승무원이 되었다. 그들은 ‘지상의 스튜디어스’ ‘고속철의
꽃’이라 불리며 모든 이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. 이들의 채용부터 입사 후 모든
교육과 업무가 철도공사의 주도로 진행되었고, 이제 막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꽃다
운 청춘들은 국가를 믿으며 정규직 전환을 기다렸다. 그러나 1년을 기다려도, 2년을
기다려도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. 철도공사는 그녀들로 하여금 계속 다른 자회
사와 단기간의 계약갱신을 할 것을 요구했다.
결국 2006년 3월, 여승무원들은 약속했던 ‘직접고용’을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했다.
철도공사는 자회사와의 계약을 거부한 280명을 무더기로 해고했다. 절대 물러설 수
없었던 승무원들은 온갖 방법의 투쟁을 하며 줄기차게 철도공사에게 본인들의 권리
를 주장했다. 하지만 철도공사는 이를 철저히 외면했고, 공권력마저 그녀들을 억압
했다. 그 후, 11년이란 시간이 흘렀다. 그 사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며, 투쟁은
계속됐다. 함께 했던 동료들은 점점 줄어 34명만이 남았다. 기약 없는 싸움, 그들이
이렇게까지 계속 싸워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?
■ 불법파견 피하려다 승객안전 포기하다니
KTX 해고 여승무원들은 점거, 삭발, 단식, 고공 농성 등으로 20대의 대부분을 보냈
다. 결국 마지막은 법정 투쟁